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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이야기

크림치즈 1kg, 어찌어찌 해치우기

 

 

이 모든 여정의 시작은 레드 벨벳 케이크였다.

얼마 전, 새로 시작하는 칼럼 준비를 위해서 레드 벨벳 케이크를 구울 계획을 세웠다. 당시 알아본 바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레드 벨벳 케이크에 바르는 프로스팅은 익힌 루 프로스팅. 하지만 만들기 쉬우면서 가벼운 산미가 케이크의 뒷맛을 잡아주는 크림치즈 프로스팅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전통을 버리기로 마음먹었었다. 분명히 레드 벨벳 케이크 레시피를 잡으려면 서너 번 이상은 구워야 할 테고, 컵케이크가 아닌 홀케이크를 구울 생각이니 크림치즈는 넉넉히 사야겠지! 그렇게 나는 인터넷에서 끼리 크림치즈 1kg을 주문했다.

하지만 때는 구정이라 집에 내려가야 했고, 집은 부산이고, 크림치즈가 도착할 곳은 서울의 우리 집이었지만, 구정 선물 러쉬 때문에 크림치즈는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부산에서 레드 벨벳 케이크를 연달아 굽고 올라왔더니 대문 앞에 얌전히 앉아있는 크림치즈 1kg.

이걸 어쩐다.

그래서 크림치즈 1kg 해치우기에 돌입했다.


1 크림치즈 프로스팅

크림치즈 프로스팅은 무적이다. 크림치즈가 어떻게든 맛을 잡아주니까 실패할 가능성도 낮고, 레드 벨벳 케이크는 물론 당근 케이크, 단호박 케이크, 초콜릿 케이크 등에도 잘 어울린다. 크림치즈에 무염버터, 슈거파우더, 바닐라 에센스에 소금만 약간 뿌리면 되니 재료 준비도 간편하다. 만들면서 주의해야 할 점이 딱 한 가지 있다면 크림치즈와 버터를 각각 비슷한 질감이 될 때까지 풀어준 다음에 섞어야 한다는 것 정도. 실제로 저지른 실수인데, 성격이 급해서 이 정도면 되었겠지 싶을 만큼 실온이 된 크림치즈와 버터를 덩어리째 섞었더니 아주 자잘하게 멍울져서 보기에도 좋지 않고 부피가 줄어들어 바르기도 힘들었다.

집에 돌아온 다음 레드 벨벳 케이크를 한 번 더 구우면서 크림치즈 부피를 많이 덜어냈다. 24cm 지름 원형 케이크 틀로 구운 홀케이크에 바른 크림치즈 프로스팅 재료는 크림치즈 450g에 무염버터 340g, 슈거파우더 4, 바닐라빈 씨드와 소금 약간. 1kg 중 반절 가까이를 한 번에 소비했다!


2 콘치즈 with 크림치즈

짭짤하고 고소한 안주이자 사이드 메뉴로, 딱히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숟가락으로 퍽퍽 퍼먹고 싶은 음식은? 적어도 나에게는 콘치즈다. 집에서 간단하게 콘치즈를 만들 때는 버터를 녹여서 통조림 옥수수를 부은 다음 달달 볶고, 체다 치즈를 넣고 섞거나 모차렐라 치즈를 얹고 오븐에서 구웠다. 하지만 지금은 당장 눈앞에 놓인 크림치즈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과제.

구글을 닦달해서 레시피를 찾아보니 슬로우 쿠커로 만드는 콘치즈에는 주로 크림치즈가 들어갔다. 하지만 나에게는 슬로우 쿠커도 없고, 슬로우 쿠커의 조리시간을 기다릴 수 있는 인내심도 없지. 그래서 약식으로 콘치즈 with 크림치즈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이런 메뉴는 자고로 계량할 필요 없이 먹고 싶은 재료를 눈대중으로 먹고 싶은 만큼 넣어야 맛있다. 일단 통조림 옥수수 대신 냉동 옥수수를 해동해서 알만 훑어낸다. 그리고 달궈서 버터를 녹인 팬에 옥수수를 넣고 치익- 하는 소리를 즐긴 다음, 골고루 갈색을 내서 맛을 최대한 이끌어 낸다. 그리고 우유를 옥수수가 반쯤 잠길 만큼 붓고 거의 졸아들 때까지 익힌다. 이제 크림치즈를 한 덩이 뚝 잘라 넣고(!), 전체적으로 잘 버무린 다음 오븐용 그릇에 담고 모차렐라 치즈를 얹어 오븐에서 갈색을 띨 때까지 굽는다.

크림치즈로 만든 콘치즈의 단점을 굳이 찾자면 느끼함이 덜하다는 것. 좀 더 맛을 진하게 내고 싶다면 크림치즈와 체다치즈를 섞어서 넣자. 이렇게 콘치즈로 해결한 크림치즈가 한 150g. 갈 길은 대략 400g 정도 남았다.

 

3 로제 파스타 소스

생토마토 껍질 벗기기부터 시작해서 파스타 소스를 만들었다,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참 좋았겠지만 매우 귀찮았다. 요새는 시판 소스도 맛있으니까! 크림치즈를 넣어서 로제 소스를 만들면 가끔 날카롭게 느껴지는 토마토 소스의 산미가 부드러워진다.

부드러운 맛을 좋아해서 직접 장을 보러 가면 항상 토마토나 크림 대신 로제 파스타 소스를 구입하지만, 작년 초가을 즈음 발등에 금이 가서 신랑이 대신 부엌을 담당하게 되면서 무심결에 토마토 소스를 사온 적이 있었다. 그때 로제 파스타를 요청하면서 그냥 토마토 소스에 크림이나 치즈를 넣으면 돼라고 말했더니 신랑이 냉장고에 남아있다는 이유로 크림치즈를 넣었다. 그런데 웬걸, 그렇게 만든 로제 파스타가 정말 맛있었다. 이후 우리 집 로제 파스타는 순수한 토마토 소스에 크림치즈를 넣어서 만드는 방식으로 전면 변경되었다.

고기를 듬뿍 넣고 파스타를 만들 때도 토마토 소스에 크림치즈를 넣어서 로제로, 파스타를 삶기 귀찮을 때는 양파만 볶아서 토마토 소스와 크림치즈를 넣고 녹여서 밥 위에 뿌리고 모차렐라 치즈를 얹어서 오븐에서 굽는다. 이런 식으로 해결한 크림치즈가 거의 200g.

 

4 연어 크림치즈 딥

이제 크림치즈를 약 200g 남긴 채로 이사를 했고, 이렇게 된 김에 집들이에서 크림치즈를 해결하기로 했다. 볼에 크림치즈를 넣고 살살 푼 다음에 다진 훈제연어와 꼬르니숑을 넣었다. 아마 딜이나 셜롯이 있었으면 다져서 넣었겠지. 하지만 없었으니까 대신 레몬즙과 제스트를 잔뜩 넣었다. 그릇에 담아서 바삭하게 구운 빵과 함께 내면 끝.

 

드디어, 드디어 크림치즈를 전부 먹어 치웠다. 아마 이러고도 남아 있었다면 당분간 아침마다 베이글을 먹거나 뉴욕 치즈케이크를 한 판 구웠겠지. 하지만 크림치즈를 사면 보통 그렇게 소비했기 때문에 가능하면 요리로 소화하고 싶었다. 아마 1kg씩 사서 이만큼 다양하게 소비할 수 있는 치즈도 많지 않을 것이다. 짧은 기간 동안 머리를 잔뜩 쥐어짠 맛있고 즐거운 고민이었다. 만일 다음에 뭔가를 대용량으로 사서 어찌어찌 해치울 궁리를 하게 된다면 아마 사워크림이 아닐까. 가까운 시일 안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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