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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이야기

한여름의 포도주스

한여름의 포도주스(정연주)

자취생에게 밥과 라면은 주식, 김치와 참치는 주식을 먹기 위한 부식, 그리고 과일은 사치품이다.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정말 살 수 있을까?

 

자취를 하던 대학생이 이상하게 잇몸에서 출혈이 심해 치과에 갔더니 괴혈병이라더라, 이제 돈가스에 딸려 나온 양배추까지 집어 먹는다더라, 괴담 같지만 젊음을 갈아넣다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대학가 원룸촌, 최소한의 영양소로 끼니를 때우며 바쁘게 오가는 자취생이 모여 사는 동네 마트의 과일 코너는 뭔가 다르다. 과일의 종류가 많지 않을 뿐더러 최대한 소분해서 천 원 단위로 포장되어 있고, 그나마도 제때 다 팔리지 않아 무르고 상해 있기 일쑤다. 그렇게 성한 부분만 뜯어내 포장한 감귤 쪼가리나 바닥이 물크러진 자두 세 알이라도 기뻐하며 사는 이유는, 사람은 밥만 먹고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과일을 먹으면 사람답게 사는 것 같기 때문이다.

 

취업을 하면 무엇을 하고 싶었는가 하면, 뭐든 좋으니 과일을 상자째 사보고 싶었다. 어린 시절에 슈퍼마켓 진열대 꼭대기에 놓인 과자 종합 선물세트를 갖고 싶다고 바란 것과 비슷한 소원이다. 필요한 만큼 '금욕적'으로 사는 게 아니라, 먹고 싶은 만큼 먹고도 내일 또 먹을 수 있을 만큼 수북하게 사고 싶었다. 그리고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무엇이 문제였을까? 혼자서 다 먹을 수 없었다. 이럴 수가, 과일 소비는 너무나 난이도가 높았다. 못 사면 못 사는 대로 문제, 사면 사는 대로 문제다.

 

그런 고민은 본가의 엄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자식들이 서울로 떠나고 둘만 남자, 어떤 과일을 사도 남아서 썩고 버리기 일쑤였다. 어쩌다 우리가 내려가도 머무르는 날짜보다 과한 음식을 사는 바람에 과일은 여전히 남아돌았다. 엄마의 그런 갈등을 해결한 건 주서기, 그러니까 착즙기였다. 포도를 사면 껍질과 씨까지 깔끔하게 갈아서 진한 보라색 주스를 만들고, 수박을 사면 하얀 부분까지 알뜰하게 짜서 묘한 짭짜름함이 느껴지는 수박색 주스를 만들어 냉장고에 넣었다. 그러면 물보다 자극적인 마실 거리를 찾는 여름철에 그보다 더 안성맞춤일 수 없었다. 과일을 넉넉하게 사도 버릴 일이 없으니 망설임이 사라졌고, 명절이라고 사과며 배 선물이 들어와도 덜 버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도 마음 속 위시리스트로 오래도록 간직하던 착즙기를 구입했다. 그리고 신세계를 만났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주스를 만들려면 최상의 상태로 소비하고도 넘칠 만큼 과일이 남아돌아야 한다. 그러니 상자 째로 살수록 이득이다. 그리고 과일을 씻어서 잘라서 '먹는' 것과 냉장고에서 꺼내서 '마시는' 것은 전혀 다른 감각이다. 간편한 정도도 다르지만, 갈증 해소와 당분 섭취가 빛의 속도로 진행된다. 과일의 저장성도 높아진다. 명절 선물로 배 상자가 들어오면 먹다가 지치면 갈아서 마시고, 그래도 남으면 소분해서 얼린다. 갈비찜에 넣어도 좋고, 녹여서 먹어도 최고다. 상자 아래 깔린 귤이 무르고 터져서 곰팡이 발원지가 되려고 하면 일단 짜서 냉장고에 넣는다. 귤에는 딱딱한 씨가 없으니 착즙기도 특히 편안하게 돌아가고, 시판 주스처럼 첨가물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비타민을 보충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무르기 직전의 과일을 사다가, 상자째로 사서 미처 다 먹지 못해서 초파리가 들끓고 아깝게 내버리다가, 이제 남은 과일은 착즙해서 호쾌하게 주스로 마신다. 과일 처리 난이도와 함께 업그레이드하는 인생 난이도에도 통달해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조금씩 사람답게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들게 만든다.

 

지금 냉장고 문을 열면 껍질까지 죄다 착즙해서 진한 보라색인 포도주스가 있다. 한여름이 시작되었다는 신호탄이자, 제대로 살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달콤쌉싸름한 위로다.

 

Writing:&Drawing 정연주

 

Blog: 같은 주제 아래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모임, 『노네임 포럼』 http://nonameforum.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