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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이야기

눈가리고 아웅하기, 치즈버거 샐러드

세상은 살 만한 곳이야! 수프도 있고또 뭐가 있지?”

샐러드.”

그리고 뉴욕은 위험에 빠졌다. 유쾌한 도시 퇴마 블록버스터 <고스트버스터즈>(2016)의 한 장면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유능하고 정신 나간 천재 과학자 홀츠먼에게 푹 빠져 있었지만, 저 순간만큼은 악당에게 감정이입할 수 밖에 없었다. 샐러드가 있어서 세상이 살 만하다니, 저 세계는 패러럴 월드라 샐러드란 파이나 아이스크림을 뜻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샐러드에 대한 반감은 순전히 생채소에 기인한다. 일절 가열하지 않은 채소 특유의 미묘한 쓴맛과 풋내, 질긴 식감을 완전히 가리려면 산뜻하고 가벼운 비네그레트가 아니라 묵직하고 끈적한 마요네즈 베이스 드레싱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마저도 해결책이라기보다 미봉책에 가깝다. 덕분에 몸에 좋은 일을 해야 한다는 일말의 죄책감을 안고 신선한 샐러드를 우적우적 씹다보면 마음 속 깊은 곳이 서글퍼진다. 왜 이렇게까지 우울해하면서 샐러드를 먹어야 할까? 솔직히 고기를 먹을 때도 상추쌈은 그다지 즐기지 않지만 숙쌈은 없어서 못 먹고, 불고기나 잡채를 만들 때는 채소를 듬뿍 넣고 그것만 골라 먹을 정도라 어느 순간 포기하고 채소는 익혀 먹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분명 날로 먹을 때에만 섭취할 수 있는 영양소가 있고,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샐러드가 존재하며, 무엇보다 요리를 하면서 날로 먹는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래서 간헐적으로 새로운 샐러드를 만들어보고 실망한 후 채소스틱에 쌈장을 내놓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치즈버거 수프라는 존재를 접했다. 치즈버거에 수프를 곁들여 내는 메뉴가 아니다. 다진 고기와 양파를 볶고 치즈를 듬뿍 넣어 그야말로 녹진녹진하게 끓인, 딥과 한끗 차이로 보이는 느끼해보이는 수프였다. 그러고보니 파파존스에서 자주 시키는 메뉴 중 하나도 치즈버거 피자다. 두 메뉴의 공통점이라면 다진 고기와 치즈가 있으며, 잘게 썬 토마토와 피클을 넣기도 하며, 굳이 따진다면 구운 햄버거빵 크루통이나 피자 도우라는 탄수화물이 예의상 따라온다는 것 등을 들 수 있겠다.

 

놀랍게도 치즈버거의 무한한 가능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치즈버거 타코, 베이컨 치즈버거 딥(빵이나 감자튀김(!)을 찍어 먹는다), 치즈버거 그라탕, 치즈버거 팬케이크, 치즈버거 오믈렛, 치즈버거 케밥 등이 줄줄이 뒤를 이었다. 해체와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치즈버거 그라탕은 그저 치즈가 과하게 들어간 볼로네제 파스타 캐서롤이 아닌가? 어디까지가 치즈버거로 인정받는 것일까? 이러다 치즈버거 스무디도 등장할 판이다. 잠깐, 이미 있는 건 아니겠지? 놀랍게도 존재했지만, 비위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서 깊게 알아보기는 포기했다. 물론 어떤 치즈를 얹고 얼마나 층층이 쌓아올리건 상관없이 치즈버거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대체 치즈버거란 무엇이길래 이토록 온갖 메뉴로 변신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다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애저녁에 치즈버거의 원형을 잃은 이 모든 레시피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끼니마다 치즈버거를 먹고 싶은 사람을 위한 핑곗거리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다진 고기에 양파, 토마토, 피클, 녹진한 치즈에 원하는 소스가 있다면 굳이 빵 사이에 끼워 먹는 정도正道를 걷지 않아도 행복한 끼니가 된다. 아주 합리적이고 욕구에 충실한 결과물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맛있는 샐러드를 만들고 싶다는 도저히 이룩하기 힘들었던 목표가 있지. 도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치즈버거 레시피 아이디어를 살펴보면 미트볼과의 차이를 주기 위해서인지 주로 다진 고기와 양파 등을 볶아서 사용하지만, 패티라는 형태를 포기할수록 타코나 볼로네제와 구분하기 힘들어진다. 따라서 치즈버거를 만들 때와 동일한 방식으로 다진 소고기에 소금과 후추, 넛맥, 파프리카로 간을 한 다음 납작하게 구워서 치즈를 얹어 녹인 치즈버거 기본 패티를 만들었다. 양상추는 채썰고 토마토 대신 파프리카를 작게 자른 후, 얇게 저민 딜 피클을 더했다. 그리고 햄버거를 먹을 때도 생양파보다 볶은 양파를 선호하므로 양파만큼은 익혔다. 토마토가 있었으면 상큼한 소스를 가볍게 만들었겠지만 아쉽게도 없어서 간단하게 케첩과 마요네즈, 머스터드 약간을 섞어서 뿌렸다. 햄버거빵을 구워서 크루통으로 얹었다면 치즈버거에 대한 완벽한 오마주가 되었겠지만 치즈버거 스무디도 존재하는 판에 굳이 빵을 굽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만든 치즈버거 샐러드는 인생 최고 샐러드의 지위를 차지했다. 그럴 수 밖에. 채소를 한 입 먹을 때마다 고기와 치즈가 따라오는데 이보다 더 나은 샐러드가 있을 수 있나. 물론 데미그라스 소스를 뿌린다면 아슬아슬하게 샐러드를 수북하게 곁들인 치즈 햄버그라는 메뉴와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 무엇이 치즈버거 샐러드를 치즈버거답게 만들까? 놀랍게도 피클이다. 맛있긴 한데 어디가 치즈버거인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먹는 도중, 갑자기 지금 입 안에 든 음식이 치즈버거라는 실감이 강하게 느껴졌을 때 씹은 재료가 바로 피클이었다. 정작 햄버거를 먹을 때는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리지만, ‘치즈버거 샐러드라는 정체성을 견고히 만들기 위해서는 뺄 수 없는 재료다.

 

지글지글 구워서 치즈를 얹은 패티에 드레싱까지 끼얹으면 절대 칼로리가 낮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생채소를 먹으면 슬퍼지는 사람도 무려 맛있게샐러드를 먹을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치즈버거가 추앙받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떤 메뉴도 사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놀라운 선택지인 것이다. 스스로 지금 먹는 것이 고기라고 우기고 싶은 건지, 샐러드라고 속이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눈가리고 아웅일지언정 나에게는 이제 무적의 샐러드 메뉴가 있다!

Writing&Drawing 정연주

Blog: 같은 주제 아래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모임, 『노네임 포럼』 http://nonameforum.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