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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이야기

실패한 쿠키의 마지막 희망, 럼 레이즌

 

그러니까 원래 의도한 칼럼 방향은 이게 아니었다. 깍지 모양이 선명하고 봉긋한 버터링 쿠키를 굽고 럼 레이즌 크림치즈 필링을 만들어서 샌드한 다음 먹을 예정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하면, 전날 미리 굽기 시작한 버터링 쿠키 반죽이 아주 멋지게 퍼지면서 한 판을 한 덩어리 쿠키로 만들어버렸다. 원인은 괴로울 정도로 명확하게 알고 있다. 버터와 설탕 크림화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으며, 오븐 온도를 훨씬 낮게 잘못 맞춘 탓에 버터가 줄줄 흘렀고그러니까 한 마디로 쿠키를 심각하게 오랜만에 만들면서 정신머리도 빼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패의 아픔을 딛고 다음 날 다시 굽겠다는 각오를 다졌지만, 곧 방향을 수정했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게 이런 뜻이라고 궁시렁거리면서 퍼져버린 쿠키조각을 먹었더니 맛있지 뭔가. 그렇다면 문제는 외관이 넙적하고 볼품없다는 것 뿐이니 원래 의도한 칼럼 방향의 2단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적용하면 되는 문제였다. 완벽한 럼 레이즌 샌드쿠키로 건포도 편들기가 아니라, 실패한 쿠키도 되살리는 럼 레이즌 필링으로 건포도 찬양하기로.

 

나는 건포도 애호가다. 군데군데 섞여서 뻑뻑한 빵을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건포도 때문에 모카빵을 좋아하고, 콩 대신 건포도를 넣은 백설기를 발견하면 계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코스트코 매장에서 시나몬과 건포도를 넣은 디너롤과 베이글을 사다가 얼려서 쟁여두기도 한다. 굳이 쪼글쪼글한 건포도를 맨입으로 주워먹지는 않지만, 생포도에 없는 감칠맛이 진하게 묻어나는 통통하게 불린 건포도라면 어디에든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출처도 기억나지 않는 외국 어딘가의 자료에서 '초콜릿칩 쿠키인 줄 알고 먹었는데 건포도였을 때 느끼는 분노'에 대한 기록을 읽었을 때 내가 얼마나 당황했을지 생각해보자. 얼마 전 노네임 맛캐스트 녹음을 할 때에도 다시금 느꼈지만, 찐득찐득한 식감 때문인지 독특한 향기 때문인지 복합적인 이유인지 건포도를 혐오하는 세력의 목소리는 애호가 못지않게 크다. 각종 베이커리에서 아무런 표시도 예고도 없이 건포도를 만났을 때의 짜증, 이미 주변부를 물들여서 빼내도 아무 소용 없는 존재감이 선사하는 지긋지긋함. 대체 가지째 나무에 매달린 채로도 자연스럽게 탄생하는 건포도라는 녀석은 무슨 죄를 등에 업고 태어났길래 강렬한 애호와 증오를 한 몸에 받는 것일까.

 

자연 건조한 건포도를 처음 본 장소는 미국 출장길에 들린 한 자그마한 와이너리였다. 아담한 높이로 다듬은 포도나무들 사이사이로 적당히 솎아내 흙바닥에서 자연스럽게 마른 건포도 가지가 널려있었다. 와인이 될 날을 기다리며 익어가는 탱탱한 형제 포도들과 달리 이미 노년을 맞이한 듯이 쪼그라든 껍질과 과육. 포도 농장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자,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르게 흘러가는 세월을 드러내는 묘한 광경이었다. 건포도를 향한 애정이 더 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후로 공장에서 말린 건포도에서도 왠지 햇살의 기운이 느껴진다.

 

이렇게 콩깍지가 제대로 부착된 건포도 애호가는 본인의 취향을 백 번 반영한 건포도 저장식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건포도는 쪼글쪼글 말라붙어서 딱딱할 때도 있고, 가끔은 미처 제거하지 못한 작은 가지가 붙어있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액체에 담가서 다시 부들부들하고 통통하게 부푼 건포도의 식감을 선호한다. 간단하게 물에 불리기도 하지만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의 라인업에도 당당하게 올라있듯이 불린 건포도 하면 럼 레이즌 아니겠는가. 럼 레이즌을 만드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간단하게 만들 때는 럼과 물을 붓고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하룻밤 담가서 천천히 불린다. 만약에 건포도의 식감은 유지한 채로 럼의 향만 더하고 싶다면 전자레인지에 돌려도 상관없지만, 아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하룻밤 담가서 불려야 건포도를 제대로 촉촉하게 만들 수 있다.

럼의 알코올을 제거하고 싶다면 가볍게 끓인 다음 물로 농도를 조절해도 좋지만, 그렇다고 알코올이 완전히 날아가지는 않고 풍미 또한 약간 달라진다. 차라리 오렌지나 사과 주스를 대신 이용해서 새로운 맛을 만드는 편이 안전하다.

 

어떤 액체를 사용했건 일단 하룻밤 재운 건포도가 통통해졌다면 크림치즈와 버터를 실온에 내놓아 부드럽게 만들자. 크림치즈는 깔끔한 맛이 나도록 흰설탕으로 단맛을 내고, 잘게 다진 불린 건포도를 넣고 잘 섞는다. 취향에 따라서 바닐라 익스트랙트나 시나몬 파우더를 더하면 잘 어울린다. 실온의 버터는 잘 푼 다음 무스코바도나 데메라라 등 비정제 갈색 설탕을 넣는다. 럼과 어우러져서 풍미가 깊어지기 때문이다. 원한다면 럼을 가볍게 더해서 럼버터에 가깝게 만들 수도 있다. 불린 건포도를 다져서 넣고 섞으면 완성! 럼 레이즌 크림치즈 필링과 럼 레이즌 버터는 둘 다 유제품 100g을 기준으로 설탕 반 큰술과 건포도 한 큰술을 넣어 만들지만, 입맛에 맞춰서 양은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다.

 

럼 레이즌 크림치즈 필링은 실패작 버터 쿠키에 샌드해서 차갑게 굳혀 먹으면 실패의 쓴맛을 깨끗하게 씻어낼 수 있다. 식빵으로 달콤한 샌드위치를 만들 때 넣어도 좋고, 베이글에 플레인 크림치즈 대신 발라서 달콤한 간식 시간을 즐길 수도 있다. 유산지에 싸서 냉동하면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럼 레이즌 버터 또한 활용도가 높다. 스콘이나 구운 빵, 프렌치 토스트, 팬케이크 등 따뜻하게 데운 달콤한 메뉴에는 어디든지 잘 어울린다. 이런 식으로 럼 레이즌의 매력에 빠지고 나면 아예 럼 레이즌 자체를 여기저기 넣어보자. 아이스크림, 빵 반죽, 사과 콤포트헤어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이나 마찬가지다. 건포도, 건포도. 어떻게 건포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럼 레이즌 만들기

건포도 2큰술당 럼 11/2큰술, 1/2큰술을 붓고 랩을 씌워 하룻밤 동안 냉장보관하여 불린다.

 

럼 레이즌 크림치즈 필링 만들기

실온에 두어 잘 푼 크림치즈 100g당 흰설탕 1/2큰술과 다진 럼 레이즌 1큰술을 넣어 잘 섞는다. 설탕과 건포도의 분량은 취향에 따라 가감하고, 시나몬 파우더나 바닐라를 더하면 맛이 더 뚜렷해진다.

 

럼 레이즌 버터 만들기

실온에 두어 잘 푼 버터 100g당 비정제 갈색 설탕 1/2큰술과 다진 럼 레이즌 1큰술을 넣어 잘 섞는다. 설탕과 건포도의 분량은 취향에 따라 가감하고, 럼을 살짝 더하면 풍미가 깊어진다.

 

 

 

Writing&Drawing 정연주

Blog: 같은 주제 아래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미식 웹진형 블로그, 『노네임 포럼』 http://nonameforum.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