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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이야기

0. 마라톤 여행기 프리뷰

결론부터 말하기: 나는 지난 9월 마지막 주말에 블라디보스토크 마라톤 5km를 뛰고 돌아왔다.

풀 마라톤에 비하면 ‘요만큼’에 지나지 않는 거리지만 내 개인의 일생에 비추어 보면 엄청난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중학교 때 100미터 달리기에서 진지하게 24초를 기록했으며 이제는 여유로운 삶을 추구한답시고 지하철과 횡단보도 파란불을 눈앞에서 놓쳐도 뛰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고 나서 플랫폼에 앉아 다리를 달달 떨고 있으니 ‘여유로운 삶’이란 뛰기 싫은 자의 허울 좋은 핑계일 뿐이다. 

하지만 운동에 등을 돌리고 살아도 어찌어찌 버틸 수 있었던 젊은, 아니 어릴, 아니 이십 대 시절이 지나가자 슬슬 살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는 위기감이 느껴졌다. 이틀 밤을 새우면서 마감을 했더니 메일에 파일을 첨부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두드러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거나, 집에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계단을 한 숨에 오르기 힘들어졌다거나, 뭐 그런 경험이 쌓이게 된 것이다. 

그래도 꾸역꾸역 운동할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대다가 지난 5월, 열흘 간의 파리 여행에서 하루 만 오천보씩 걷다가 돌아오니 스스로도 놀랍게도 체력이 아주 조금 좋아져 있었다. 시차 적응은 차치하고 여독은커녕 떠나기 전보다 덜 졸리고 무엇보다 일에 더 집중이 되는 것이다! 대체 몸이 얼마나 쓰레기였던 거야(나중에 알았지만 정말 쓰레기였다. 몰랐다는 게 더 놀랍다). 그래서 느닷없이 시작했다. 러닝을. 

참고로 말하지만 이 정도로 근력이 떨어지고 체력이 쓰레기인 사람이 대뜸 러닝에 너무 매진하면 안 된다. 무릎과… 발목과... 하체 여기저기의 관절이 차례로 주인에게 쌍욕을 하듯이 염증을 일으키고 정형외과와 한의원에 출석도장을 찍던 지난 몇 달 간의 기억을 되새기면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난생처음 시작한 러닝이 심히 재미있었고, 원래 무언가에 푹 빠지면 정도를 모르는 성격이다. 그래서 일단 대책 없이 뛰다가 아프기 시작하니 병원에 가고, 어떻게 해야 뛰어도 안 아플지 찾아보고, 무릎이 좀 낫고 날씨가 더워져서 실내런을 하려고 헬스장에 등록했다가, 오티 때 하체 근력 운동을 물어봤다가 얼떨결에 피티를 끊었다. 응? 내 몸이 진짜 쓰레기라는 건 이때 알았다. 

아무튼, ‘이렇게 대뜸 무리해서 뛰면 안 된다’를 온몸으로 실험하면서 그래도 꾸준히 달리고 있던 6월에 갑자기 동거인에게서 카톡이 날아왔다. ‘블라디보스토크 마라톤에 5km도 있다는데 나갈래?’ 우리 가족과 다 함께 친한 회사 지인 중에서 국내외 마라톤에 꾸준하게 나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중 한 명이 농담 삼아 다 같이 러시아에 가지 않겠냐고 한 마디 던졌다가 진지한 추진력에 불이 붙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들 재미있게 다녀오긴 했지만 여기서 우리는 자나 깨나 사람은 말조심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비루먹은 노새 같은 체력으로 런데이 어플을 따라 허위허위 뛰어보던 초보 러너 상태로 첫 마라톤을(5km지만) 무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뛰기로(5km지만) 결정해 놓고 노심초사하며 3개월을 보냈다. 그러는 중에도 발목을 다치고, 침을 맞고, 별 난리를 다 쳤지만 어쨌든 시간은 흐르고 무사히 5km를 뛰고 다녀왔다. 심각하게 재미있어! 살다가 내가 미식 여행이 아닌 여행기를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그렇다, 이건 내 첫 마라톤 여행기다(5km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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