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보기

수정과를 구우면? 곶감 캐러멜 파운드케이크다 눈 앞에 산처럼 쌓아놔도 멀뚱멀뚱, 말라 비틀어지도록 도무지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던 재료가 있었으니 바로 곶감이다. 아니, 이건 음식이 아니라 장식이지. 줄줄이 꿰여서 처마 근처에 걸려 있으면 정감 넘치고 홀수로 차곡차곡 쌓아두면 제삿상인 허연 장식품 아닌가? 턱이랑 치아가 약해서 '씹고 뜯는 맛'을 즐기지 않는 사람에게 동글납작한 곶감은 너무 질겨서 먼 그대다. 단감도 딱딱해서 별로다. 오로지 씨를 뱉을 일도 없는 부드러운 홍시만이 감나무의 존재 의의다. 라고 생각했다, 수정과에 담근 반건시를 먹기 전까지. 계피와 생강의 맵싸하고 알싸한 향을 잔뜩 머금은 부들부들 촉촉해진 곶감이라니, 적당히 쫀득해진 홍시같잖아! 숟가락으로 톡톡 건드려서 껍질 속만 파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곶감은 맛있구나... 더보기
무엇보다 버섯다운 수프를 끓이리 동화 속 나그네는 단추 하나로 맛있는 수프 한 단지를 끓였다던가. 온 동네 부엌의 자투리 재료를 끌어 모아서 폭폭 끓여 여럿이 나누어 먹었으니 맛있는 수프의 기본 요소를 전부 갖춘 셈이다. 수프란 건 그렇다. 기본만 알면 얼마든지 그때그때 냉장고 속 사정에 맞춰 적당히 맛있게 끓일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버섯 수프만큼은 성에 차게 끓이려면 약간의 노하우가 필요하다. 평소 수프를 끓이는 법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수프는 토마토나 채소 베이스의 맑은 수프가 아닌 부드러운 크림 수프다. 일단 기본적으로 감자와 양파를 준비한다. 그리고 수프의 주인공인 채소를 결정한다. 옥수수, 브로콜리, 렌틸, 단호박 등이 되겠다. 모든 채소를 잘게 썰어서 버터에 달달 볶다가 닭육수를 붓고, 아니 맹물과 치킨스톡 큐브를 넣.. 더보기
바다에 연기를 입히면, 훈제굴과 맥주 비네그레트 꼬르동 블루 기초반에서 간신히 칼질이나마 하고 있을 때 제일 기다리던 수업은 중급반 후반부의 아틀리에였다. 이유는 오로지 하나, 훈제연어 만드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꼬르동 블루에서는 기초부터 상급까지 모든 수업에서 사용하는 육수 및 기타 재료를 직접 만드는데, 거의 모든 요리에 들어가다시피하는 훈제 삼겹살은 물론이고 끄트머리 한조각까지 남김없이 입에 넣게 되는 훈제연어도 예외가 아니다. 이말인즉슨 채소 스프 한 그릇 만드는 데 두 시간 반이 걸리는 기초 시절부터 끝내주는 훈제연어를 먹으며 중급에 가면 이걸 만드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는 셰프의 희망고문을 듣게 된다는 뜻이다. 요리야 원래 대부분 굽고 데쳐서 재료의 형질을 바꾸는 과정이라지만, 훈제는 특히 어딘가 연금술 같은 면이 있다. 매캐한 연기를 입.. 더보기
갈등의 고리, 떡볶이와 물떡 작년 이맘때 생일날, 해야할 일도 거쳐야 할 일도 많아 다사다난한 이십대를 떠내보내며 '지긋지긋한 20대가 드디어 끝났다!'고 외칠만큼 속이 시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이를 먹으며 두려움 하나가 묵직하게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으니, 바로 탄수화물 과다섭취다. 고독한 미식가 이노가시라 고로는 어느 날 식사의 국과 반찬에 '돼지고기가 겹치고 말았다'며 찜찜해하지만, 나는 한 식탁 위에서 탄수화물이 겹칠 때 제일 신경이 곤두선다. 감자볶음도 감자조림도 감자전도 사랑해 마지않지만, 그들의 존재가 탄수화물이라는 사실을 새삼 인지하는 순간 더 이상 지금까지와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차라리 감자며 고구마를 넣어 밥을 지을 지언정, 서로 다른 그릇에 탄수화물 두 종류가 담긴 밥상을 내 손으로 차릴 수는 .. 더보기
촉촉한 글루텐 프리, 밤 초콜릿 케이크 영화 에 등장하는 한 통통한 남자아이는 강당에 모인 전교생이 응원하는 가운데 쟁반 가득히 담긴 초콜릿 케이크를 몽땅 먹어치우고 얼굴이며 손, 팔까지 초콜릿 범벅을 한 채로 포효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음식 중에서도 그다지 입맛을 당기게 하는 장면은 아니지만, 초콜릿에게 마땅히 강요하고 싶은 미덕 하나만큼은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 바로 치명적인 '녹진함'이다. 초콜릿은 본래 굵은 나무줄기에서 툭 튀어나온 큼직한 꼬투리 속 콩으로 태어나는데다, 제과제빵을 하는 사람이라면 주로 어디에나 쓸 수 있는 딱딱한 판초콜릿 형태로 만나게 된다. 무릇 초콜릿이라면 촉촉하고 부드러워야지! 하고 주장하기에는 애로사항이 크다. 하지만 모든 여정을 거쳐 내 입속에 들어올 초콜릿이라면 반드시 뚝뚝 흘러내리기 직전이라고 할 만큼 녹.. 더보기
조건부 사랑, 마롱 글라세 풍 바닐라 밤절임(정연주)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려면 그 대상이 어떤 형태를 띠어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 가벼운 강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면서도 시시때때로 곱씹는 주제다. 하지만 결론이야 어떻든, 가을의 결실이자 겨울의 주전부리인 밤만큼은 달콤해야 애정이 샘솟는다. 그래, 반드시 달아야 한다. 어릴적 만화 속에서 보던 것처럼 화로에서 군밤을 굽는 시절도 아니고, 길거리에서 파는 군밤을 사 먹는 일은 절대 없다. 얼마나 익혔는지 그야말로 고무처럼 질기기 일쑤니까. 어머니가 간단하게 삶은 밤을 반으로 잘라 주면 작은 그릇을 든 것처럼 찻숟가락으로 파먹곤 했지만, 꼬물거리며 먹는 재미가 있었을 뿐이지 부슬부슬한 밤맛의 매력에 이끌리지는 않았다. 처음 밤을 먹고 놀란 순간은 뜬금없이 서커스를 보러 갔을 때 좌판.. 더보기
실패한 쿠키의 마지막 희망, 럼 레이즌 그러니까 원래 의도한 칼럼 방향은 이게 아니었다. 깍지 모양이 선명하고 봉긋한 버터링 쿠키를 굽고 럼 레이즌 크림치즈 필링을 만들어서 샌드한 다음 먹을 예정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하면, 전날 미리 굽기 시작한 버터링 쿠키 반죽이 아주 멋지게 퍼지면서 한 판을 한 덩어리 쿠키로 만들어버렸다. 원인은 괴로울 정도로 명확하게 알고 있다. 버터와 설탕 크림화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으며, 오븐 온도를 훨씬 낮게 잘못 맞춘 탓에 버터가 줄줄 흘렀고… 그러니까 한 마디로 쿠키를 심각하게 오랜만에 만들면서 정신머리도 빼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패의 아픔을 딛고 다음 날 다시 굽겠다는 각오를 다졌지만, 곧 방향을 수정했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게 이런 뜻이라고 궁시렁거리면서 퍼져버린.. 더보기
수제 소시지&초리소 만들기 어느 곳에서는 1군 발암물질, 어떤 집에서는 김치에 곁들이면 더할 나위 없는 밥도둑. 전 인생에 걸쳐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시기마다 아토피가 재발했던 나에게는 애증의 대상이었던 햄과 소시지는 어언 1년 전, WTO 산하기관이 대놓고 발암물질로 규정하면서 더더욱 집어들기 껄끄러운 식재료가 되어갔다. 그렇다고 먹지 않았느냐? 그건 아니고, 소위 ‘쏘야’를 만들 때는 소시지를 따로 볶아서 넣고, 구운 스팸은 개수를 세 가면서 먹는 정도로 건강에 신경을 쓰는 척 해왔을 뿐이다. 아니, 우리나라에서는 세계미문으로 명절 선물에 등극할 정도인 쌀밥의 친구 햄과 소시지에 ‘발암물질’이라는 딱지가 붙었다고 해서 냉큼 식생활에서 밀쳐내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의리가 있지. 물론 발암물질은 심각한 단어지만, 요컨대.. 더보기
DIY 팬케이크 믹스 만들기 그렇다, 나는 팬케이크 믹스를 직접 만들어 쓰기로 결심했다. 이유를 굳이 거창하게 설명하자면 나와 팬케이크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하나라도 없애고 싶었고,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매번 시판 믹스를 사 오고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기가 귀찮았다. 사람마다 귀찮아하는 대상이야 제각각이겠지만 어차피 노상 베이킹을 하는 사람이라면 팬케이크 믹스 정도는 지금 당장 벌떡 일어나기만 하면 5분 만에 만들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딱 네 가지 기본 재료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 5분의 과정을 길게 늘여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일단 DIY 팬케이크 믹스를 어디에 보관할지 결정하자. 가루 재료뿐이라 밀폐 유리병에 넣어도 좋고, 아무 보존 용기에 담아도 괜찮고, 심지어 지퍼락에 넣어놔도 상관없다. 볼에 밀가루(중력분.. 더보기
눈가리고 아웅하기, 치즈버거 샐러드 “세상은 살 만한 곳이야! 수프도 있고… 또 뭐가 있지?” “샐러드.” 그리고 뉴욕은 위험에 빠졌다. 유쾌한 도시 퇴마 블록버스터 (2016)의 한 장면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유능하고 정신 나간 천재 과학자 홀츠먼에게 푹 빠져 있었지만, 저 순간만큼은 악당에게 감정이입할 수 밖에 없었다. 샐러드가 있어서 세상이 살 만하다니, 저 세계는 패러럴 월드라 ‘샐러드’란 파이나 아이스크림을 뜻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샐러드에 대한 반감은 순전히 생채소에 기인한다. 일절 가열하지 않은 채소 특유의 미묘한 쓴맛과 풋내, 질긴 식감을 완전히 가리려면 산뜻하고 가벼운 비네그레트가 아니라 묵직하고 끈적한 마요네즈 베이스 드레싱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마저도 해결책이라기보다 미봉책에 가깝다. 덕분에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