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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이야기

여유로운 척, 홍차 마시기 베스트3 ​ 눈코 뜰 새 없을 때는 지금 내가 얼마나 넋이라도 있고 없는 상태인지 깨달을 시간도 없다. 한숨 돌리고 나서야 오늘은 차 한 잔 마실 틈도 없었구나, 중얼거리게 된다. 그렇다, 차 한 잔. 홍차와 그를 둘러싼 집기며 간식은 여유의 상징이다. 영국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티타임을 즐긴다고 놀리는 장면에서는 주로 전쟁터에서 포탄이 터지는데도 티테이블은 먼지 한 톨 없이 차려져 있고 찻잔을 든 손은 미동 없이 굳건하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은 티코지부터 샌드위치까지 챙겨서 애프터눈 티를 즐기겠다는 마음이 여유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이미 머릿속에서는 그런 이미지가 몇 단계의 비약을 거쳐서, 카페인을 투약하는 마음으로 복용하는 커피처럼 머그잔에 담아서 모니터에 눈을 고정한 채로 마시더라도 그것이 홍.. 더보기
촉촉한 소금벽, 소금 크러스트 감자 ​ 지금 와서 돌이켜보건대, 소금 크러스트를 직접 만들기 전에는 수많은 궁금증이 존재했다. 소금 크러스트, 그러니까 소금 반죽이라는 게 대체 뭐지? 반죽까지 먹을 수 있나? 애초에 왜 굳이 소금으로 반죽을 만들어서 굽는 걸까? 왜 나는 존재 자체에 의문을 가지면서도 소금 크러스트를 만들어보고 싶을까? 이 모든 궁금증의 해답은 바닷가에 놀러 가면 먹곤 하는 대하 소금구이의 존재 의의와 비슷하다. 차림새가 강렬해서 존재감이 뚜렷한데, 생각보다 간단하고 맛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소금 반죽은 절대로 먹을 수 없다. 50% 이상이 순수하게 소금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만지고 나서 손을 핥기만 해도 짜다. 왜 핥아봤느냐고는 물어보지 말자. 감자칩을 먹고 나면 손가락을 핥아야 하는 것과 비슷한 반사작.. 더보기
정말 팬 여섯 개가 필요할까, 뵈프 부르기뇽 ​ 보통 평범한 가정에는 팬이 몇 개나 있을까? 혹여나 살다보니 쌓인 팬이 십여 개씩 있다 하더라도 음식을 하면서 그걸 한 번에 다 꺼내서 쓰고 닦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미국에 프랑스 요리를 널리 알린 줄리아 차일드 레시피의 악명 높은 지점도 바로 여기다. 요리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팬 대여섯 개를 지지고 볶고 오븐에 집어 넣는다. 이걸 확인하기 위해서 집에 있는 을 꺼내 뵈프 부르기뇽 레시피를 읽으면서 필요한 팬 개수를 세어 봤다. 총 여섯 개가 쓰인다. 물론 나도 대여섯 개를 쓰는 방식으로 배웠다. 재미있달까 아이러니하달까 이렇게 만드는 뵈프 부르기뇽은 주로 프랑스 가정식이라고 불린다. 누가 평일 저녁에 식탁을 차리려고 팬을 여섯 개나 꺼내고 싶을까! 뵈프 부르기뇽의 가정적인 면은 과연 무엇일.. 더보기
봄나물엔 크림, 냉이 감자 그라탕 ​ 얼마 전, 인터넷 장보기에서 여닫는 마개가 달린 1리터들이 수입 생크림을 발견했다. 드디어 꿈꿔왔던 언제나 크림이 샘솟는 냉장고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올레! 그동안은 멸균우유처럼 생긴 자그마한 휘핑크림이나 빨간 오백미리 생크림을 열심히 사서 쟁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본격적으로 쓰기에 양이 부족하고, 오믈렛이나 수프 가니시에 한두 큰술 쓰고 싶어서 적당히 남겨두려 해도 제대로 봉하기 힘들어서 보존하기 마뜩찮다. 하지만 이제 우유병만큼 넉넉한 크기의 크림통이 있으니 마개만 열어서 콸콸 부어 쓸 수 있다. 꿈인가? 냉장고에 항상 크림을 마련해두고 싶은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어린 시절 보던 외국 소설에는 크림 단지가 동그마니 놓인 부엌이 자주 등장했기에, 크림 한 통을 갖춰두면 .. 더보기
우유가 남아도는 날, 포크 인 밀크 우유도 물처럼 정수기에서 받아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 천지 제일 수요 예측하기 힘든 재료가 우유다. 넉넉하게 사두면 맘놓고 찔끔찔끔 쓰다가 툭하면 유통기한을 넘기고, 아까워서 조금씩 사면 금방 바닥나서 프렌치토스트를 만들 때 손이 떨린다. 이럴 거면 두 배로 사다 놓을 걸! 하지만 그랬다가는 다시 익숙한 과거로 돌아가, 유통기한을 애매하게 이삼일 넘긴 우유통을 들고 이 정도면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고민하게 된다. 묘하게 짧은 우유의 유통기한과 하루에도 두세 번씩 바뀌어서 예측불허한 '이따 뭐 먹지'의 조화가 빚어낸 불행이다. 뭐, 없어서 못 쓸 때는 나가서 사오면 된다. 하지만 묵직한 플라스틱 병에 우유가 절반이나 남아있는데 유통기한이 간당간당 한다면? 벌컥벌컥 마셔 없애는 데도 한계가 있다.. 더보기
부록, 곶감 크림치즈말이 곶감, 특히 반건시의 매력은 햇빛을 받으면 반투명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쫀득쫀득한 속살인데 그림으로 그리니 어딘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원망은 내 손에 맡기고 아쉬운 마음으로 사진을 곁들인다. 레시피랄것도 없는 초간단 간식이자 안주, 곶감 크림치즈말이를 만들어보자. 큼직한 반건시를 사용하면 만들기 더 쉽다. 곶감은 꼭지와 밑동을 잘라내고 반으로 칼집을 넣어 넓게 편다. 볼에 넣어서 잘 푼 크림치즈에 잣이나 호두를 적당량 넣어 잘 섞는다. 곶감에 적당히 넣어서 돌돌 만다. 반건시로 만들었으면 아주 말랑말랑해서 썰기 힘드므로 잠시 냉장고에 넣어서 살짝 단단하게 굳힌다. 반으로 썰어서 단면이 보이도록 꽃잎처럼 모아서 낸다. Writing&Drawing 정연주 Blog: 같은 주제 아래 하고.. 더보기
수정과를 구우면? 곶감 캐러멜 파운드케이크다 눈 앞에 산처럼 쌓아놔도 멀뚱멀뚱, 말라 비틀어지도록 도무지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던 재료가 있었으니 바로 곶감이다. 아니, 이건 음식이 아니라 장식이지. 줄줄이 꿰여서 처마 근처에 걸려 있으면 정감 넘치고 홀수로 차곡차곡 쌓아두면 제삿상인 허연 장식품 아닌가? 턱이랑 치아가 약해서 '씹고 뜯는 맛'을 즐기지 않는 사람에게 동글납작한 곶감은 너무 질겨서 먼 그대다. 단감도 딱딱해서 별로다. 오로지 씨를 뱉을 일도 없는 부드러운 홍시만이 감나무의 존재 의의다. 라고 생각했다, 수정과에 담근 반건시를 먹기 전까지. 계피와 생강의 맵싸하고 알싸한 향을 잔뜩 머금은 부들부들 촉촉해진 곶감이라니, 적당히 쫀득해진 홍시같잖아! 숟가락으로 톡톡 건드려서 껍질 속만 파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곶감은 맛있구나... 더보기
무엇보다 버섯다운 수프를 끓이리 동화 속 나그네는 단추 하나로 맛있는 수프 한 단지를 끓였다던가. 온 동네 부엌의 자투리 재료를 끌어 모아서 폭폭 끓여 여럿이 나누어 먹었으니 맛있는 수프의 기본 요소를 전부 갖춘 셈이다. 수프란 건 그렇다. 기본만 알면 얼마든지 그때그때 냉장고 속 사정에 맞춰 적당히 맛있게 끓일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버섯 수프만큼은 성에 차게 끓이려면 약간의 노하우가 필요하다. 평소 수프를 끓이는 법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수프는 토마토나 채소 베이스의 맑은 수프가 아닌 부드러운 크림 수프다. 일단 기본적으로 감자와 양파를 준비한다. 그리고 수프의 주인공인 채소를 결정한다. 옥수수, 브로콜리, 렌틸, 단호박 등이 되겠다. 모든 채소를 잘게 썰어서 버터에 달달 볶다가 닭육수를 붓고, 아니 맹물과 치킨스톡 큐브를 넣.. 더보기
바다에 연기를 입히면, 훈제굴과 맥주 비네그레트 꼬르동 블루 기초반에서 간신히 칼질이나마 하고 있을 때 제일 기다리던 수업은 중급반 후반부의 아틀리에였다. 이유는 오로지 하나, 훈제연어 만드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꼬르동 블루에서는 기초부터 상급까지 모든 수업에서 사용하는 육수 및 기타 재료를 직접 만드는데, 거의 모든 요리에 들어가다시피하는 훈제 삼겹살은 물론이고 끄트머리 한조각까지 남김없이 입에 넣게 되는 훈제연어도 예외가 아니다. 이말인즉슨 채소 스프 한 그릇 만드는 데 두 시간 반이 걸리는 기초 시절부터 끝내주는 훈제연어를 먹으며 중급에 가면 이걸 만드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는 셰프의 희망고문을 듣게 된다는 뜻이다. 요리야 원래 대부분 굽고 데쳐서 재료의 형질을 바꾸는 과정이라지만, 훈제는 특히 어딘가 연금술 같은 면이 있다. 매캐한 연기를 입.. 더보기
갈등의 고리, 떡볶이와 물떡 작년 이맘때 생일날, 해야할 일도 거쳐야 할 일도 많아 다사다난한 이십대를 떠내보내며 '지긋지긋한 20대가 드디어 끝났다!'고 외칠만큼 속이 시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이를 먹으며 두려움 하나가 묵직하게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으니, 바로 탄수화물 과다섭취다. 고독한 미식가 이노가시라 고로는 어느 날 식사의 국과 반찬에 '돼지고기가 겹치고 말았다'며 찜찜해하지만, 나는 한 식탁 위에서 탄수화물이 겹칠 때 제일 신경이 곤두선다. 감자볶음도 감자조림도 감자전도 사랑해 마지않지만, 그들의 존재가 탄수화물이라는 사실을 새삼 인지하는 순간 더 이상 지금까지와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차라리 감자며 고구마를 넣어 밥을 지을 지언정, 서로 다른 그릇에 탄수화물 두 종류가 담긴 밥상을 내 손으로 차릴 수는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