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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이야기

촉촉한 글루텐 프리, 밤 초콜릿 케이크 영화 에 등장하는 한 통통한 남자아이는 강당에 모인 전교생이 응원하는 가운데 쟁반 가득히 담긴 초콜릿 케이크를 몽땅 먹어치우고 얼굴이며 손, 팔까지 초콜릿 범벅을 한 채로 포효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음식 중에서도 그다지 입맛을 당기게 하는 장면은 아니지만, 초콜릿에게 마땅히 강요하고 싶은 미덕 하나만큼은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 바로 치명적인 '녹진함'이다. 초콜릿은 본래 굵은 나무줄기에서 툭 튀어나온 큼직한 꼬투리 속 콩으로 태어나는데다, 제과제빵을 하는 사람이라면 주로 어디에나 쓸 수 있는 딱딱한 판초콜릿 형태로 만나게 된다. 무릇 초콜릿이라면 촉촉하고 부드러워야지! 하고 주장하기에는 애로사항이 크다. 하지만 모든 여정을 거쳐 내 입속에 들어올 초콜릿이라면 반드시 뚝뚝 흘러내리기 직전이라고 할 만큼 녹.. 더보기
조건부 사랑, 마롱 글라세 풍 바닐라 밤절임(정연주)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려면 그 대상이 어떤 형태를 띠어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 가벼운 강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면서도 시시때때로 곱씹는 주제다. 하지만 결론이야 어떻든, 가을의 결실이자 겨울의 주전부리인 밤만큼은 달콤해야 애정이 샘솟는다. 그래, 반드시 달아야 한다. 어릴적 만화 속에서 보던 것처럼 화로에서 군밤을 굽는 시절도 아니고, 길거리에서 파는 군밤을 사 먹는 일은 절대 없다. 얼마나 익혔는지 그야말로 고무처럼 질기기 일쑤니까. 어머니가 간단하게 삶은 밤을 반으로 잘라 주면 작은 그릇을 든 것처럼 찻숟가락으로 파먹곤 했지만, 꼬물거리며 먹는 재미가 있었을 뿐이지 부슬부슬한 밤맛의 매력에 이끌리지는 않았다. 처음 밤을 먹고 놀란 순간은 뜬금없이 서커스를 보러 갔을 때 좌판.. 더보기
실패한 쿠키의 마지막 희망, 럼 레이즌 그러니까 원래 의도한 칼럼 방향은 이게 아니었다. 깍지 모양이 선명하고 봉긋한 버터링 쿠키를 굽고 럼 레이즌 크림치즈 필링을 만들어서 샌드한 다음 먹을 예정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하면, 전날 미리 굽기 시작한 버터링 쿠키 반죽이 아주 멋지게 퍼지면서 한 판을 한 덩어리 쿠키로 만들어버렸다. 원인은 괴로울 정도로 명확하게 알고 있다. 버터와 설탕 크림화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으며, 오븐 온도를 훨씬 낮게 잘못 맞춘 탓에 버터가 줄줄 흘렀고… 그러니까 한 마디로 쿠키를 심각하게 오랜만에 만들면서 정신머리도 빼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패의 아픔을 딛고 다음 날 다시 굽겠다는 각오를 다졌지만, 곧 방향을 수정했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게 이런 뜻이라고 궁시렁거리면서 퍼져버린.. 더보기
수제 소시지&초리소 만들기 어느 곳에서는 1군 발암물질, 어떤 집에서는 김치에 곁들이면 더할 나위 없는 밥도둑. 전 인생에 걸쳐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시기마다 아토피가 재발했던 나에게는 애증의 대상이었던 햄과 소시지는 어언 1년 전, WTO 산하기관이 대놓고 발암물질로 규정하면서 더더욱 집어들기 껄끄러운 식재료가 되어갔다. 그렇다고 먹지 않았느냐? 그건 아니고, 소위 ‘쏘야’를 만들 때는 소시지를 따로 볶아서 넣고, 구운 스팸은 개수를 세 가면서 먹는 정도로 건강에 신경을 쓰는 척 해왔을 뿐이다. 아니, 우리나라에서는 세계미문으로 명절 선물에 등극할 정도인 쌀밥의 친구 햄과 소시지에 ‘발암물질’이라는 딱지가 붙었다고 해서 냉큼 식생활에서 밀쳐내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의리가 있지. 물론 발암물질은 심각한 단어지만, 요컨대.. 더보기
DIY 팬케이크 믹스 만들기 그렇다, 나는 팬케이크 믹스를 직접 만들어 쓰기로 결심했다. 이유를 굳이 거창하게 설명하자면 나와 팬케이크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하나라도 없애고 싶었고,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매번 시판 믹스를 사 오고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기가 귀찮았다. 사람마다 귀찮아하는 대상이야 제각각이겠지만 어차피 노상 베이킹을 하는 사람이라면 팬케이크 믹스 정도는 지금 당장 벌떡 일어나기만 하면 5분 만에 만들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딱 네 가지 기본 재료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 5분의 과정을 길게 늘여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일단 DIY 팬케이크 믹스를 어디에 보관할지 결정하자. 가루 재료뿐이라 밀폐 유리병에 넣어도 좋고, 아무 보존 용기에 담아도 괜찮고, 심지어 지퍼락에 넣어놔도 상관없다. 볼에 밀가루(중력분.. 더보기
눈가리고 아웅하기, 치즈버거 샐러드 “세상은 살 만한 곳이야! 수프도 있고… 또 뭐가 있지?” “샐러드.” 그리고 뉴욕은 위험에 빠졌다. 유쾌한 도시 퇴마 블록버스터 (2016)의 한 장면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유능하고 정신 나간 천재 과학자 홀츠먼에게 푹 빠져 있었지만, 저 순간만큼은 악당에게 감정이입할 수 밖에 없었다. 샐러드가 있어서 세상이 살 만하다니, 저 세계는 패러럴 월드라 ‘샐러드’란 파이나 아이스크림을 뜻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샐러드에 대한 반감은 순전히 생채소에 기인한다. 일절 가열하지 않은 채소 특유의 미묘한 쓴맛과 풋내, 질긴 식감을 완전히 가리려면 산뜻하고 가벼운 비네그레트가 아니라 묵직하고 끈적한 마요네즈 베이스 드레싱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마저도 해결책이라기보다 미봉책에 가깝다. 덕분에 .. 더보기
빵과 샌드위치의 마리아주 다시는 탄수화물을 무시하지 마라 빵과 샌드위치의 마리아주 탄수화물은 마성의 물질이다. 이유를 알 길 없는 ‘사람이 밥을 먹어야지’와 오로지 빵집을 찾기 위해 버스며 기차에 오르는 전국 빵순이들의 시도때도 없는 금단증상은 탄수화물 중독이라는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다. 덕분에 지방과 더불어 다이어터들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기도 한다. 탄수화물을 배척하라! 아마 중독성이 더 강해서인지, 묘하게 지방보다 더 큰 애증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런 탄수화물이 지닌 마성의 매력이 제일 두드러지는 음식은 바로 샌드위치다. 재료만 적절히 배치하면 균형잡힌 식단이 된다는 샌드위치지만, 만일 여기서 빵을 뺀다면 무엇이 될까? 그냥 샐러드다. 때로는 필리 치즈 스테이크처럼 빵을 빼면 그라탕 비슷한 메뉴가 되기도 하지만, 생야채.. 더보기
빙수의 공식, 빙수101 [TOPIC:7] 빙수의 공식, 빙수101(정연주) 한여름에도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고수하고 찬물 샤워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사람마저 체면불구하고 얼음물을 들이키게 만드는 역사적인 더위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체력도 의욕도 송두리째 앗아간 뜨거운 열기여, 내 비록 올해는 이제나 끝날까 저제나 멈출까 허우적대며 굴복하고 말았지만 다음부터는 갖은 방법으로 물들이고 치장한 얼음 가루를 흩뿌리며 너희를 물리치고 말리라. 이토록 격앙된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폭염에 뇌 한 쪽이 익어버린 모양이다. 예상치 못한 더위에 미처 방어 태세를 갖추지 못하고 흐물흐물 녹아버렸던 이번 여름, 칼을 가는 심정으로 어떤 빙수든 만들어낼 수 있는 빙수의 공식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원하는 맛을 내는 요소.. 더보기
잃어버린 풍미를 찾아서, 올리브 마리네이드(정연주) 잃어버린 풍미를 찾아서, 올리브 마리네이드(정연주) 마르셀 프루스트는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먹고 나서 장장 7편, 총 16권에 달하는 유년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냈다. 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와인을 마실 때마다 겪어본 적도 없는 가면무도회며 춤추는 소녀의 정경을 떠올린다. 만일 바닷물에 발 한 번 담가본 적 없는 손님이 지중해의 꿈을 꾸도록 만들고 싶다면, 여기 단 한 가지 해결책이 있다. 바로 올리브 마리네이드다. 올리브는 날로 먹을 수 없는 과실이다. 쓴맛을 내는 석탄산 계열 물질 때문에 도저히 나무에서 따자마자 베어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알칼리성 용액에 올리브를 담가서 쓴맛을 제거하고 발효시켜서 먹을 수 있게 만든다.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소설 에는 단단한 녹색 올리브, 농익은 보라색 올리브 등.. 더보기
한여름의 포도주스 한여름의 포도주스(정연주) 자취생에게 밥과 라면은 주식, 김치와 참치는 주식을 먹기 위한 부식, 그리고 과일은 사치품이다.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정말 살 수 있을까? 자취를 하던 대학생이 이상하게 잇몸에서 출혈이 심해 치과에 갔더니 괴혈병이라더라, 이제 돈가스에 딸려 나온 양배추까지 집어 먹는다더라, 괴담 같지만 젊음을 갈아넣다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대학가 원룸촌, 최소한의 영양소로 끼니를 때우며 바쁘게 오가는 자취생이 모여 사는 동네 마트의 과일 코너는 뭔가 다르다. 과일의 종류가 많지 않을 뿐더러 최대한 소분해서 천 원 단위로 포장되어 있고, 그나마도 제때 다 팔리지 않아 무르고 상해 있기 일쑤다. 그렇게 성한 부분만 뜯어내 포장한 감귤 쪼가리나 바닥이 물크러진 자두 세 알이라.. 더보기